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프랑스군 남성 합창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하는 가운데 프랑스 삼색기로 뒤덮인 고인의 관 앞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지난 9일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파리의 앵발리드 기념관에서 엄수된 프랑스 국민배우 장폴 벨몽도(1933~2021) 국장(國葬)의 한 장면이다. 그는 2년 전 타계한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과 똑같은 예우을 받으며 바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국장 중계를 지켜보던 시민 수천 명의 뜨거운 배웅 속에 떠났다. 문화대국 프랑스가 아니면 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영화배우가 국장의 대상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프랑스의 국장(‘L’hommage national’) 대상자는 대통령이 결정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장폴 벨몽도는 ‘국보’이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조사에서 벨몽도는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 2차대전 후 경제부흥기를 뜻함)의 격변을 보여주는 얼굴이라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 재임기간인 지난 4년 여간 프랑스에서 민간인으로 국장의 대상인 된 인물 중에는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1932~2019) 외에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생존자로 1970년대 프랑스 보건부 장관과 유럽의회 의장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가 시몬 베유(Simone Veil, 1927~2017)가 있다. 그는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내용의 법률 제정을 주도함으로써 20세기 여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여성 선구자다. 

               장폴 벨몽도(1933~2021).
               장폴 벨몽도(1933~2021).

1960~7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열풍을 이끌며 영화계에 지울 수 없는 한 획을 그은 장 폴 벨몽도는 이제 이들과 함께 프랑스 영웅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벨몽도란 한 예술인에 대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문화가 프랑스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웅변해 주는 헌사다. 60년 동안 9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예술영화에서 액션,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기로 알랭 들롱(86)과 함께 1960~1970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그를 세상에 알린 출세작이었다.

뛰어난 기량의 문화예술인을 기리는 것은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다. 1977년 9월 마리아 칼라스가 파리에서 53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 프랑스 방송들은 이를 일제히 톱 뉴스로 보도하고, 이이서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코리아헤럴드 파리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나는 이를 보고 프랑스가 문화대국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쇼팽, 피카소, 샤갈 등 천재적인 외국 예술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예술 인재 영입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그리스계로 뉴욕에서 태어난 칼라스는 유럽에서의 공연 활동을 통해 프랑스인들에게도 친숙한 예술인이었는데 그가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그가 살던 파리 16구의 조르주 망달가(街) 아파트에는 칼라스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표지석이 붙어 있다.

파리를 방문하는 고급 여행자들이라면 프랑스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꼭 찾아야 할 곳이 있다. “위인들에게 조국은 감사한다”라는 문구가 건물 정면에 새겨져 있는 웅장한 돔 양식의 팡테옹이다. 프랑스 공화국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곳에는 전직 대통령이나 앙시앙 레짐의 왕족의 묘는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들은 대개는 향리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고 왕족들은 파리 외곽의 생드니 성당 등 다른 곳에 안치되어 있다. 팡테옹에는 빅토르 위고,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앙드레 말로 등 프랑스를 빛낸 뛰어난 문인과 천재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팡테옹은 원래는 루이 15세(1715~1774년 재위)가 파리의 수호 성인인 생트 주느비에브에게 헌정하기 위해 성당으로 지은 건물이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이곳의 지하묘지는 프랑스 혁명에 공헌한 인물들의 묘지가 되었고, 명칭도 그리스어로 '만신전(萬神殿)'이란 뜻의 팡테옹으로 변경되었다.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유해가 이곳에 이장되었고 이를 전후하여 다른 문인들도 여러 명 묻히게 되었다.

팡테옹은 시대 변화에 맞추어 프랑스의 위인들을 기리는 ‘공화국의 전당’(un temple républicain)으로 계속 진화해 왔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팡테옹 안장 대상자를 나폴레옹 일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했으나 3, 4공화국에서는 의회에서, 현 5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이 여론과 관계기관에 자문해 결정한다. 안장 대상자는 사후 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평가를 거쳐 상당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선정한다.

퀴리 부부는 1995년 이장되었으며 <삼총사>를 쓴 프랑스의 대 문호 뒤마는 흑백 혼혈의 혈통과 작품의 통속성 등을 이유로 팡테옹 이장을 두고 학계에서 논란이 일었으나, 2002년 시라크 대통령의 결단으로 사후 132년 만에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이번 벨몽도의 국장 엄수를 보면서 언젠가는 그와 같은 대중 예술인도 팡테옹에 안장될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영화의 나라 프랑스, 늘 창의적인 변혁을 추구해온 프랑스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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