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올해 노벨평화상은 CNN 기자 출신인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와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공동 수상했다. 노벨평화상 120년 역사에서 언론인이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1935년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1889~1938)가 노벨평화상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수상 이유는 ‘독일의 재무장 반대 운동’으로, 평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공적이었다. 금년 수상자인 두 언론인의 선정 사유는 각기 두테르테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에 맞서 정권의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한 탐사보도였다. 언론 자유가 세계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이번 노벨평화상 선정은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는 모든 살아 있는 권력에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다.

노벨평화상은 스톡홀름에서 시상하는 다른 다섯 개 부문의 노벨상과는 달리 오슬로에서 수여한다.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의한 것이다. 이 상이 제정되던 1901년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연합(Union) 형태의 국가였다. 필자는 서울평화상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양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유럽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해 가을 노벨위원회는 같은 해 서울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빈곤 퇴치 운동가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금년도 노벨평화상 발표를 보면서 떠오르는 사건과 인물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과 이를 신문지상을 통해 고발한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다. 1894년 9월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하던 프랑스인 여자 청소원은 무관실 휴지통에서 프랑스 군사 기밀이 담긴 찢어진 문서를 발견한다. 청소원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제보자였다. 당국은 졸속 필적 감정 후 알자스 지방 출신 유대인인 프랑스 포병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를 체포한다.

알자스는 1870~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함으로써 독일 영토가 된 지역이다. 그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의해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l'île du Diable)으로 유배된다. 그 당시 프랑스 사회에는 반독일 정서와 국수주의,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 간 것이다.

          에밀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신문 '로로르'의 1면.
          에밀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신문 '로로르'의 1면.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로로르’(L'Aurore, ‘여명’이라는 뜻)란 신문 1면 전면에 걸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한다. 펠릭스 포르(Félix Faure, 1841~1899)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의 이 격문에서 졸라는 여러 사법적 오류와 증거의 부족을 지적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위의 부당한 구속 수감을 비난한다. 졸라는 기소되어 1898년 2월 23일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구속을 피하기 위해 그는 영국으로 도주하였으며, 1899년 6월에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졸라의 격문은 불의한 권력에 맞선 언론 보도의 전범으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켜 ‘J'accuse!’는 영어 사용 국가에서도 권력자의 불의에 항의하는 표현이 되었다. 이 격문은 드레퓌스 지지파(dreyfusards)와 반대파(antidreyfusards) 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프랑스 사회를 공화주의자와 전통주의자로 양분시킨다.

드레퓌스 지지파 중에는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 증거의 허점을 지적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 후일 총리가 된 로로르의 발행인 조르주 클레망소 등이 있었다. 아나톨 프랑스는 1901년 반드레퓌스파를 공격하면서 ‘xénophobe’(외국인 혐오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는 드레퓌스의 결백함을 믿는 프랑스 지식인과 언론, 그리고 여론이 힘을 합쳐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유배됐던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도화선 역할을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의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사회 참여를 하는 지식인을 가리켜 intellectuel(intellectual(英), 지식인)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고 사회의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 현실에 뛰어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에밀 졸라의 격문은 불의를 고발하는 언론 캠페인(media crusading)의 모델이 되었다. 또 드레퓌스 사건은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이 된 시오니즘운동을 탄생시켜 세계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관타나모(Guantánamo) 수용소 비판자들이 드레퓌스 사건을 원용할 정도로 이 사건의 교훈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며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남긴 명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는 아직도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금년도 노벨평화상이 더욱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언론인들이여 고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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