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지난주에 슬리퍼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하나는 40대 가장이 아내와 두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그 남자는 열 살 먹은 큰아들이 자기 슬리퍼를 허락도 없이 신고 나가자 심하게 욕하며 나무랐는데, 그때 자신을 무시해온 가족들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사건은 10월 25일에 벌어졌지만 살인의 구체적 계기가 슬리퍼라는 사실은 지난주에 밝혀졌다.

그도 아들이 어릴 때는 발에 맞지 않는 아빠의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귀여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슬리퍼가 남자 대 남자로 맞서는 도구가 됐다고 받아들였나 보다. 아이는 부쩍 자라고 별다른 직업이 없는 그는 그대로이거나 점차 쪼그라들어 가장의 위신과 체면이 설 자리가 없는 상태였다.

또 다른 사건은 mbc기자가 출근길 대통령과 즉석문답을 하는 자리에 슬리퍼를 끌고 나가 홍보를 맡은 비서관과 말싸움을 벌인 해프닝. 돌아서서 가는 대통령의 뒷전에 소리를 질러 질문을 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언쟁을 하는 영상이 퍼지면서 기자가 슬리퍼를 신은 게 주목받게 됐다. 동네 슈퍼마켓에 물건 사러 나온 것도 아니고 마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럴 수가 있나. “기자냐 깡패냐”, “최소한의 예의도 모른다”는 비난이 쏟아지면서 ‘쓰레빠 기레기’라는 말까지 번졌다. 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기자를 테러하겠다고 협박한 사람도 있다니 더 기가 막힌다.

슬리퍼는 발이 시원하고 활동하기 편하려고 신는 신발이다. 그러나 내게 편한 것이 남에게는 불편하거나 무례한 물건이 될 수 있다.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생물 교생 한 분은 갑자기 시커먼 고무 슬리퍼를 벗더니 칠판에 갖다 대고 백묵으로 테두리를 따라 그리고는 “아메바가 이렇게 생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생들이 떠들면 슬리퍼를 벗어 칠판을 때리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는데,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였다. 슬리퍼를 벗어서 학생들 뺨을 때린 교사도 있었다.

기가 막힌 건 또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인 4월 초에, 부인 김건희 여사가 흰색 슬리퍼를 신은 차림으로 산책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그 이후 약 3만 원대인 그 슬리퍼가 완판됐다지만, 나는 이런 보도 안 믿는다. 팬클럽 지지자들이 앞장서서 슬리퍼 사진을 공유하며 "나도 사고 싶은데 (일부 사이트에서) 벌써 품절됐다", "완판녀", "검소하다" 등의 찬사를 보냈는데 참 우스운 일이었다.

이번엔 슬리퍼가 범죄행위에 동원된 사례. 발가락 사이에 초소형 카메라를 끼워 몰래 여성의 신체를 촬영하는 등 7년간 1만 건 이상 불법 촬영을 한 남성이 올해 1월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중소기업 대표인 그는 지난해 6월 슬리퍼를 신은 채 발가락 사이에 초소형 카메라를 끼운 뒤 얇은 여름 양말로 이를 가리고 불법 촬영을 하다 경찰에 검거됐다. 정말 별 사람이 다 있다.

슬리퍼에도 미담은 있다. 2016년에 중장으로 전역한 전인범 장군은 내구성이 높은 ‘국방부 슬리퍼’의 주인공이다. 그는 27사단장 시절에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개선해준다고 약속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라며 입에 슬리퍼를 물고 서서 시위를 벌였다. 소장이 중장에게 들이댄 건데, 이 일을 계기로 슬리퍼가 바뀌었다. 국방부가 2019년 현역 장병 1994명을 대상으로 군 보급품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54종 중 만족 기준인 4점을 넘는 유일한 품목이 슬리퍼였다. '국방부의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슬리퍼는 전역할 때 꼭 챙겨 나오는 물건이라고 한다. 불만족 1위 보급품은 위생상태가 불량한 수통이었다. 

 슬리퍼를 입에 물고 시위하는 전인범 장군(왼쪽 사진 오른쪽)과 그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국방부 슬리퍼'.
 슬리퍼를 입에 물고 시위하는 전인범 장군(왼쪽 사진 오른쪽)과 그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국방부 슬리퍼'.

슬리퍼를 잘 활용한 사례는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는 전 일본 숨바꼭질대회, 만국 거짓말쟁이대회, 게다(일본의 나막신) 댄스 콘테스트 등 별의별 대회가 다 있는데, 1997년부터 일본의 각 도시에서 열리는 슬리퍼 탁구대회도 별난 대회 중 하나다.

일본 야마가타(山形) 현의 가호쿠초(河北町)는 농업이 번성했던 지역으로, 겨울이면 짚신을 만들어 팔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일본 최대의 슬리퍼 생산지가 됐다. 그런데 거품경제 붕괴로 슬리퍼 판매가 급감하자 판매를 늘리기 위해 고심 끝에 슬리퍼 탁구 경기를 구상하게 됐다. 그 뒤 슬리퍼 판매량이 급증하고 슬리퍼 탁구대회는 전국 대회로 확대되더니 2004년부터는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국제 대회로 격상됐다. 

 일본의 슬리퍼 탁구대회. 탁구 라킷처럼 특수 제작된 슬리퍼로 경기를 하고 있다.
 일본의 슬리퍼 탁구대회. 탁구 라킷처럼 특수 제작된 슬리퍼로 경기를 하고 있다.

야마가타 현에서는 발뒤꿈치 부분이 가늘고 밑창이 가죽으로 된 탁구 경기용 슬리퍼가 특수 제작되고 있다. 대회 우승자에게는 금색 슬리퍼가 수여된다.

**이 글의 결론=질질 또는 찍찍 끌고 다니는 슬리퍼는 값비싼 물건이 아니지만 쓰임새가 풍부한 생활용품이다. 슬리퍼는 제 주인이 뭘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다. 제발 슬리퍼를 조심스럽게 잘 이용하라. 슬리퍼는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천하고 하찮은 물건이 아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