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보수 우위의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주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판례를 반세기 만에 파기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이 판결 직후 대국민 연설에 나선 진보 성향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이 미국을 150년 전으로 돌려놨다. 슬픈 날이다.”라고 개탄한 후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이 판결을 11월 중간선거에서 쟁점화하겠다는 뜻이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번 판결이 여성 신체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에 관한 헌법상 기득권을 부인하는 ‘여성과 사법 제도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정했다.

이웃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등 미국의 전통 우방 지도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왜일까? 서구에서는 낙태와 피임의 권리를 여성해방의 분수령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한 미국의 국내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로 낙태권 폐기 판결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75년 낙태를 합법화했는데 이번 미국 사태를 보고 낙태권을 헌법에 명문화하기로 했다.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미 보수 대법관들의 ‘원전주의자(originalist)’ 해석이 경종을 울린 것이다. 지난달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된 프랑스 하원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야가 쉽게 합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방대법원의 5대 4 판결로 미국 여성들이 임신 6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낙태할 수 있도록 했던 1973년의 ‘로 대(對) 웨이드'(Roe v. Wade)판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성폭행을 이유로 낙태를 요구했던 여성의 가명 ‘로’와 텍사스 주 정부를 대표했던 검사 ‘웨이드’의 이름을 딴 이 판결은 그 이후 여성의 낙태에 관한 각 주정부 입법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됐다. ‘바이블 벨트(Bible Belt)’라 불리는 미국 남부 보수 성향 지역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는 입법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로 대 웨이드’ 판례에 가로막혔다.

이 판례의 폐기로 앞으로 낙태 규정은 주 정부 및 의회의 권한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미국 50개 주 가운데 약 절반이 넘는 26개 주에서 낙태를 규제하는 입법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 세력과 공화당이 대변하는 보수 세력의 분포를 그대로 반영하는 전망이다. 낙태권은 총기 소지 자유와 함께 미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주요 이슈다.

이번 판결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법원 장악’ 시나리오의 ‘성공’을 알리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트럼프는 보수적 의제에 충성하는 대법관들을 기용하면서 대법원의 확실한 보수화를 추구해왔다. 노환으로 사망한 진보 성향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임기 말에 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등 트럼프는 모두 3명의 대법관을 기용했다. 그 결과 이번 판결에는 찬성하지 않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 9명의 대법관 중 6명이 보수 성향이다. 트럼프는 대법관 후보를 지명할 때 낙태권 판례에 관한 입장을 평가 잣대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번 판결에 대해 2024년 재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트럼프 자신도 겉으로는 ‘승리’라고 환영하고 있지만 사석에서는 공화당에 해가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고 보도했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63%는 ‘로 대 웨이드’ 판례의 폐기를 반대하고 있다.

앞으로 낙태를 금지하는 주에서는 산모의 생명이 위협받는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모든 임신중지 시술이 금지된다. 이 중 일부 주는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경우도 예외에 포함시킨다. 그 외에 낙태를 하려면 주 경계를 넘어 낙태가 허용되는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하는데 이는 흑인 여성들과 취약 계층 여성들에게는 이중고가 될 것이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를 둔 주 정부는 낙태 시술 지원조치를 도입하며 이들을 보호할 계획을 발표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원정 낙태 희망자를 돕기 위해 1억2500만 달러의 예산을 요청하고, 낙태권을 강화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법안에는 낙태 시술을 하거나 이를 도와준 사람, 낙태 시술을 받은 사람을 상대로 다른 주에서 제기할 소송에 대비해 이들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임스 레티샤 뉴욕주 법무장관도 “뉴욕은 낙태를 원하는 누구에게라도 안전한 대피처가 될 것”이라며 원정 낙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제이 인슬리 워싱턴 주지사도 기자회견에서 “출산과 관련한 선택의 피난처가 되겠다”며 “주 경찰이 낙태 시술을 받으러 워싱턴주로 온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주가 하는 어떤 인도 요청도 따르지 말도록 행정명령을 발동하겠다”고 말했다. 인슬리 주지사는 원정 낙태 환자를 위한 100만 달러 규모 지원금도 약속했다.

한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대법원 결정은 전 세계적으로 우려와 의문을 낳고 있다”며 “국무부는 모든 직원이 거주지에 상관없이 산부인과 시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도 “(군인들의) 산부인과 시술 접근에 어떤 차질도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규정을 자세히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총기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이 이번에는 낙태 문제로 또 한 번 분열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이념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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