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고물가·고환율 3중고에 경기 침체 장기화 조짐

퍼펙트 스톰 앞에 경영 체계 재점검·성장 방식 고민

재무성과에 안주…미래 가치에 소홀한 휴브리스 발생

근원적 경쟁력, 기업 정체성에서 기인…“쇄신 고삐 조일 듯”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ASML CEO,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CTO 등 주요 경영진과 함께 반도체 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ASML CEO,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CTO 등 주요 경영진과 함께 반도체 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시장에 여러 가지 혼돈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기술 같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제대로 된 파이낸셜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단계적으로 달성해 신뢰도를 높이게 되면 기업 가치도 극대화될 것이라는 우리의 가설을 스스로 입증해 내야 한다.”(최태원 SK그룹 회장)

재계 1·2위 기업 수장들이의 발언이 눈길을 끈다. 약속이나 한 듯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초심’을 강조해서다. 기술 변혁기, 새 성장방정식을 고민하는 시점에 나온 두 총수의 발언은 기업의 ‘휴브리스(오만·자기과신)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향후 고강도의 ’쇄신‘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8일 유럽 출장 귀국길에서 꽤 구체적으로 소회를 밝혔다. 출국 전 “잘 다녀오겠다” “수고한다” 정도로 갈음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삼성는 반도체, 배터리, 전장 등 미래 유망산업에서 경쟁사보다 더딘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쟁사들과의 격차가 줄고 투자 집행이 늦어진 까닭이다. 주가가 5만원대까지 주저앉을 정도로 시장은 삼성의 전략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부회장의 경영 공백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중장기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을 지탱하던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 부회장은 “시장에 여러 가지 혼돈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 걸 느꼈다”며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체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 자동차 업계의 변화 등을 확인하면서 삼성의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우리가 할 일은 조직이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며 기술와 인재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 부회장은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며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좋은 사람‘을 영입해 조직문화를 혁신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성장의 원동력을 마련하겠노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기업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한 이는 이 부회장만이 아니다. 최태원 회장도 지난 17일 열린 확대경영회의에서 경영 전략과 경영 체계를 새롭게 짤 것을 주문했다. 이른바 ’SK 경영 2.0‘이다. 

최 회장은 “그동안 파이낸셜 스토리는 기업 가치와는 연계가 부족했다”며 “(그러나) 현재의 사업 모델이나 영역에 국한해 기업 가치를 분석해서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변화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단기 실적이나 재무 지표에 연연하는 방식으로는 경영 변수를 뛰어넘는 변화를 만들고 기업의 성장을 이끌 수 없다고 봤다. 때문에 올해 초 신년사에서도 “기업의 숙명은 ‘챔피언이 아니라 도전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지 말고, 전략적 유연성에 기반해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벤치마킹을 할 대상 또는 쫓아가야 할 대상을 찾거나 아니면 현재의 사업 모델을 탈출하는 방식의 과감한 경영 활동에 나서야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서 “제대로 된 파이낸셜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단계적으로 달성해 신뢰도를 높이게 되면 기업가치도 극대화될 것이라는 우리의 가설을 스스로 입증해 내자”고 당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존 경영체계를 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사진. 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존 경영체계를 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사진. SK.

총수의 발언은 함축적이다. 기업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종합적 판단을 담고 있다. 이들의 발언을 복기하면, 기업의 방향성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때문에 경영 환경이 불확실할 때에는 ‘독한 발언’으로 조직의 긴장감을 불어넣고 내부 기강을 다잡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부회장과 최 회장의 발언이 상당히 이례적인 이유는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데 있다. 

국내 기업들이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일상의 회복으로 경기 회복을 기대했지만, 국내외 경제는 위기 상황이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한 번에 기준금리 0.75%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른 경제지표들도 좋지 않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이미 5%를 넘겼다. 전 세계적인 공급망 교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줄줄이 오르면서 수출입물가도 치솟고 있다. 지난해 5월과 비교해보니, 수입 물가 36.3%, 수출 물가 23.5% 상승했다. 이에 2926억달러에 달하는 역대급 수출액을 달성하고도 78억달러의 적자를 냈다.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환율마저 꺾일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삼각파도가 거센 가운데 경기 침체는 장기화될 조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은 국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반면 물가 상승률은 높여 잡았다. IMF는 4.0%를 예상했고,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도 4.2~4.5%로 상향 조정했다. 

경영계에서는 소비 심리 위축과 수출 감소, 투자 부진, 경기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당분간 기속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국내 주요 대기업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다양한 악재가 동시에 터지는 ‘퍼펙트 스톰’에 직면했지만 대응책을 마련키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대규모 투자는 현상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만큼,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총수들이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술과 인재는 현재의 삼성을 만든 핵심 전략이다. 최고의 인재, 초격차 기술을 앞세워 질적·양적 성장을 이뤘다. SK의 기업 가치 또한 검증된 전략이다. 시장에서의 잠재력 또는 영향력이 높은 기업을 인수·합병(M&A)해 몸집을 불리는 동시에 몸값을 높여왔다. 이 부회장이 강조한 ‘기술’과 ‘인재’, 최 회장의 ‘파이낸셜 스토리’는 기업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성장방식인 셈이다. 

이를 다시 상기시킨 것은 근원적 경쟁력에 대해 화두를 던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데일리임팩트에 “삼성이나 SK가 이전처럼 극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긴 어려운데, 궤도에 오른 기업이 나태해지는 휴브리스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과 최 회장은 괄목할만한 재무성과를 달성했지만, 미래 가치를 만드는 데 소홀했다고 판단했다. 주가 부진은 위기 대응력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자 기업의 체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반영된다. 선대들의 매진했던 원칙, 즉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이유다. 

현재 재계는 ‘점검의 시간’에 돌입했다. LG그룹은 지난달부터 이달까지 전자·화학·통신 등 6개 계열사 핵심사업을 찍어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 SK그룹은 하반기 경영 밑그림을 그리고 구체적 실행방안을 모색 중이다. 삼성전자는 21일부터 IT·모바일, 소비자가전을 담당하는 DX 부문과 반도체를 담당하는 DS 부문으로 나눠 전략회의를 갖는다. 현대자동차그룹, 롯데그룹, 포스코 등도 조만간 경영전략회의를 연다. 

‘관리’에 무게를 실었던 삼성과 SK가 신사업 진출과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속도를 높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재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다른 기업들의 경영 행보도 공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반기 국내외 인재 영입, M&A가 활발히 추진되는 한편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다. 황 교수는 데일리임팩트에 “산업 재편의 속도가 가파른 ‘초격차의 시대’에 들어섰다”며 “휴브리스를 경계하고자 ‘초심’의 중요성을 강조함 점을 미뤄볼 때, 내부적으로 쇄신의 고삐를 조일 것으로 점쳐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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