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버티면 회사 힘들다”…보름 만에 사의 표명
정부여당의 전방위적 압박…검찰도 수사 착수
CEO 선임 원점으로…외부인사 등용 가능성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세계적 의결권 자문사의 찬성도 ’외풍’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KT의 차기 수장으로 내정된 윤경림 KT 그룹 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사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KT 측에서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을 아끼고 있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윤 사장의 사퇴가 결정되면 대표이사 후보 인선 작업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현모 대표의 내정과 사퇴로 KT는 사실상 경영에 차질이 빚어진 상황. 최악의 경우, 경영 공백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윤 사장은 전날 열린 KT 이사회 조잔 간담회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윤 사장은 ”내가 더 버티면 KT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이사진은 '회사를 생각하라'며 윤 사장을 만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KT는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어제 간담회에서도 큰 이슈는 없었다고 들었다”며 ”(윤 사장 사의에 대해) 전해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윤 사장은 대표 후보로 낙점되자마자 지배구조개선태스크포스(TF)를 구성, CEO 선임 방식과 이사회 구성 방식을 바꾸겠다고 약속한 데 이어 ‘대표이사 선임 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해 최고경영자(CEO)의 전횡이 벌어질 여지를 없애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윤 사장의 승부수는 통하지 않았다. 국민의 힘 의원들은 ’그들만의 리그’ ’사장 돌려막기’ 등 KT 내부 발탁을 문제삼았다. 특히 윤 사장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배임 등의 의혹이 제기된 구 대표와 '이권 카르텔'이라 '아바타'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와 KT새노조도 ”윤 후보 선임은 지난 20년간 이어져 온 CEO 리스크를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7일 국무회의와 8일 국민의 힘 전당대회에서 ’이권 카르텔을 제거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이어가, 사실상 KT CEO 인선을 염두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사정당국 또한 칼날을 겨누는 모양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업무상 배임, 일감몰아주기 등의 혐의로 구 대표와 윤 사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안팎의 반대와 검찰 수사까지 직면한 상황에서 윤 사장과 KT가 기댈 곳은 우호 지분 밖에 없는 상태다. KT는 오는 31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윤 사장의 대표 선임을 의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요 주주들이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점쳐졌다.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대표 선임 절차의 투명성과 객관성, 공정성을 문제 삼아왔다. 2대 주주인 현대차그룹은 이미 국민연금과 뜻을 같이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주요 주주 중 KT가 확보한 찬성표가 사실상 0이다.
현재 KT 지분의 57%은 소액주주와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다. 이들을 설득한다면 주요 주주들이 반대한다 해도 표 대결을 통해 윤 사장 선임은 가능하다. 국내 소액주주들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결집, 윤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세계적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래스루이스, 국내 자문사인 한국EGS평가원, 한국ESG연구소 또한 윤 사장 선임안에 대해 찬성 의견을 냈다. 물론 구심점이 없는 만큼, 소액주주들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확실히 KT에 힘을 실어줄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외국인 투자자의 경우, 실적 외에도 중장기적으로 기업 가치에 영향을 주는 요인에 대해 민감하다.
실제 업계에서는 선임 이후가 더 문제라고 본다. 윤 대통령과 여권, 시민사회단체, 새노조 등을 계속 반대할 경우, 디지코 2.0 전략이 힘을 받기 어렵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통신사업은 규제산업이고 정부, 여당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KT의 디지코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기업 경영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를 의식한 듯 임승태 법무법인 화우 고문이 사외이사를 맡지 않기로 결정했고, 윤정식 스카이라이프 대표 내정자마저 물러났다.
검찰 수사에 따라 윤 사장을 향한 도덕성 논란이 점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CEO 리스크가 커지면 ESG를 부각시켜 온 KT의 브랜드 전략에 차질이 생긴다.
더욱이 윤 사장의 구상과 달리 이사진도 새로 짜야 한다. ISS는 강충구·여은정·표현명 사외이사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다. KT 정관에 따르면, 이사회는 8명 사외이사·3명 사내이사로 운영된다. 현재 상법상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상장회사로서 이사회를 사외이사 3명 이상에 이사 총수의 과반수가 되도록 구성해야 한다. 벤자민 홍·이강철 사외이사와 박종욱 사내이사가 물러나 3석이 공석이 됐다. 상법상 KT의 이사회는 이사 총수의 과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채워야 한다.
비우호적인 환경으로 선임 후에도 사실상 ‘식물 CEO‘가 될 것을 우려한 윤 사장이 결국 중도하자를 택했다는 게 통신업계의 해석이다.
윤 사장이 사퇴하더라도 주총은 예정대로 오는 31일 열릴 예정이다. 주총에서는 대표 선임을 제외한 의안을 다루게 된다. 새 대표가 선임될 때까진 정관에 따라 이사회가 정하는 직제 순서대로 대표이사 업무를 맡는다. 서창석·송경민 사내이사 중 한 명이 대행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인사와 투자, 중장기 경영 전략이 모두 밀리게 된다.
윤 사장의 사의설이 나오자 KT 새노조는 인사 실패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노조는 ”사퇴의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회사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며 ”윤 사장이 후보를 수락한 게 무책임했던 동시에 이제 와서 사퇴한다는 것은 비겁하다”고 주장했다. 새노조는 연말부터 4개월 가까이 차기 대표 선임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사, 사업 추진 등의 업무 프로세스가 모두 멈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3번 연속 벌어진 일을 실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대혼안을 초래한 이사회에 단호한 책임을 묻는 한편, 대주주와 소액주주, KT 내부와 소통할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다음 후보자로 외부 인물이 낙점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KT 이사회와 연관성이 적되 정부여당과의 관계를 개선시킬 인물을 내세워야 인선 논란을 잠재울 수 있어서다. 구 대표가 3번에 걸쳐 CEO에 도전했다 낙마하고 윤 사장마저 물러나면서 벌써 CEO 인선만 네번째다. KT에 정통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짧은 시간 CEO 선임이 거듭 뒤집히면서 구성원들의 불안과 피로감도 쌓였다”며 ”주가 하락으로 주주들의 반발도 상당하기 때문에, 또 한번의 인사 실패는 KT에 역풍이 될수도 있다. 내부 발탁을 고수하는 대신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