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월드컵 시즌이 돌아왔다. 우리에게 월드컵의 의미는 2002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그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뉜다. 20년 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4강 신화의 기적을 써 내려갔던 감동은 지금 떠올려보아도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때론 흥분 때론 광란 때론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태어난 아이들, 이름하여 월드컵 베이비들이 속속 대학 문을 넘기 시작했다. 올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수능 응시생 가운데 N수생 중에는 월드컵 베이비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제 이들 앞에는 평균 기대수명 100세라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20대 초반 대학에서 배운 한정된 지식과 제한된 정보만으로 이후의 80년을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들이 대학 시절 필히 완수해야 하는 과업 중 하나는 자신의 직업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일일 것이다. 그 과업이 얼마나 어렵고 고되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에 주목한 생애주기 연구자들은 이들에게 ‘오디세이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문제는 한국의 오디세이 세대는 본격적 항해에 나서기도 전에 대학입시에 올인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내신 등급이나 수능 점수에 맞추어 전공을 결정하는 대학입시 속성상 ‘점수가 모자라면’ 자신이 원하는 전공 선택이 일단 불가능해진다. 한데 ‘점수가 남아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은 사회학과를 지망하고 싶지만, 행여 학원 배치표보다 자신의 점수가 남으면 ‘아까운 생각’에 점수에 맞는 과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정보력이라는 것이 수험생 아들딸 점수로 어느 대학 무슨 과를 지원할 수 있는지 감(感) 잡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에서, 아빠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대학 신입생들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두루 상상해보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직접 경험도 해보고 간접 경험도 참고하면서 원하는 직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 역량을 키우는 과정을 일컬어 ‘직업 사회화’라 한다. 직업 열망에서 출발하여 실제 취업에 이르기까지는 평균 10년 이상 걸린다는 의견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혁명에, 4차 산업혁명에, 로봇화 및 자동화로 인해 직업 세계가 획기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발표되고 있음에도, ‘문과에서 공부 잘하면 법대나 경영대, 이과에서 공부 잘하면 치의약학 계열’ 공식은 입시 현장에서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문송합니다”라 한다지만, 문·이과 통합과정이 시행된 이후 이과생이 문과를 지원할 경우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며 눈앞의 유불리만 따지는 웃픈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 계열별 모집을 하던 시절, 인기 전공과 비인기 전공이 확연히 나뉘는 바람에 다시 과별 모집으로 선회한 전례가 있다. 당시 비인기 전공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은 공부를 시작도 해보기 전에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너 사회학 전공하면 밥벌이는 어떻게 하려고 해?” 한마디에 착한 딸들이 취업률 높은(것처럼 보이는) 전공으로 옮겨가는 현장을 지켜본 기억이 생생하다.

일례로 명문대 신입생 진로희망을 보면 대학원 진학 및 해외 유학이라는 응답이 35%를 넘고, 각종 고시 도전이 20%에 이른다. 대기업 취업을 원하는 경우가 약 30%, 창업 및 생각 중이라는 의견이 15% 정도다.

부모가 권유하거나 강요한 꿈, 지극히 틀에 박힌 꿈, 아니면 막연한 꿈을 꾸는 데 익숙해진 이들이 대학에서 하는 일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다. 졸업할 때가 가까워오면 저마다 취직에 목을 매면서 말이다. 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건 환상이요 망상이요 공상일 뿐, 꿈이란 이루어지기 위해 기다리는 그 무엇이지 않던가. 성인발달심리학의 원조 대니얼 레빈슨(1920~1994)은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을 펴내면서 성인 초기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해나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꿈이란 ‘상상 속 가능성’(imagined possibilities)이라는 멋진 개념 정의와 함께.

월드컵 베이비들이 엄마 배 속에 있던 당시 붉은 악마의 슬로건이 “꿈은 이루어진다.”였고, 우리는 보란 듯이 그 꿈을 이루어냈다. 20년 전의 ‘상상 속 가능성’이 월드컵 베이비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었으리라 믿는다. 기왕이면 부모 세대가 한 번도 꾸어본 적 없는 꿈을 꾸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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