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007시리즈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대사다. 술 한잔에 담아낸 제임스 본드의 취향과 철학은 강력한 것이어서, 영화 흥행과 함께 보드카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사실. 가장 최신판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에서도 우리의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본격 거사를 치르기에 앞서 술 한 잔을 벌컥 들이켰더랬다. 독한 술을 마셨는데도 총알은 여지없이 백발백중. 긴장을 푸는 데 적당한 알코올은 진리인 건가.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을 보며 정작 놀랐던 건 도시 여자들의 ‘주량’이 아니라, 그녀들이 ‘안주발’과 ‘술 해독 능력’이었다. 저렇게 안주를 먹어대는데 어떻게 살이 하나도 안 찔 수 있는 거지? 필름이 끊길 지경으로 마신 다음 날에도 어찌 하이힐 위를 도도하게 걸으며 ‘이 세상 텐션’을 유지하는 거지? 그 와중에 그녀들은 연애까지 성공한다. 나름 ‘술꾼 도시 여자’로 불리지만, 술 마신 다음 날 숙취로 머리를 싸매며 하루를 날려버리기 일쑤인 나로서는 그녀들의 삶이 판타지로 보였다. <술꾼도시여자들>이라고 쓰고 <해장도시여자들>로 읽었던 드라마여. 

술의 해악을 경고한 영화들

물론, 세상엔 술의 해악을 경고한 작품들도 많다. 술 냄새 풍기는 대표적인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음주운전’ ‘음주노숙’ ‘음주수영’까지 즐기는 알코올 중독자로 출연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다. 인생 막다른 길에서 삶을 마감하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간 남자 벤(니콜라스 케이지)이 인생 막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버티는 매춘 여성 세라(엘리자베스 슈)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은 상대를 억지로 바꾸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나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라고 관계의 ‘룰’을 정하는 벤에게 세라는 놀랍게도 휴대용 술병을 선물한다. “내가 드디어 짝을 만났군”이라고 읊조리는 벤의 기쁨도 잠시. 알코올의존증 남자를 진짜 사랑하게 된 여자는 결국 관계의 불문율을 깨고 만다. “벤, 제발 의사에게 가봐요.” 아, 술이란 무엇인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술로 인한 한 개인의 파멸을 그렸다면, 맥 라이언의 알코올 중독자 연기가 빛났던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1994)는 술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얼마나 시궁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가를 섬세하게 파헤쳤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맥 라이언)가 즐겨 찾았던 술도 보드카였다. 냄새가 덜 나서 음주 흔적을 숨기는 데 최적인 술이라나. 우리의 전통주 막걸리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영화인 셈이다.

술의 양면성을 동시에 바라 본 <어나더 라운드>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가 술을 다뤄 온 방식은 ‘극과 극’인 면이 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들고 온 영화 <어나더 라운드>에 눈이 오래 머무른 건 이 때문. <어나더 라운드>는 술이 안기는 기쁨과 파멸을 동시에 바라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토록 진득하게 술에 대해 고찰한 영화가 있었던가 싶어진다. 

일단, <어나더 라운드>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주인공 마틴(매즈 미켈슨)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다음과 같은 세 명의 후보가 있을 때 누구에게 투표할지, 말해 봐. 1번 후보는 소아마비로 신체 일부를 못 쓰고 고혈압 환자야.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불사하고 점술가와 정치를 논하지. 줄담배에다 마티니도 지나치게 마셔. 다음 2번 후보. 과체중이고 남들과 협동할 줄 모르고 역시 줄담배야. 잘 때마다 어머 어마한 샴페인, 코냑과 위스키를 마신 후 수면제 두 알을 먹어. 마지막 3번 후보. 이 사람은 공훈이 큰 전쟁 영웅이야. 비흡연자에 동물 애호가고 음주량도 드물게 맥주 한 병 정도. 자, 누굴 찍을래?” 

학생들의 선택은 당연히(?) 3번. 그런 학생들에게 마틴이 말한다. “너희는 방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윈스터 처칠을 버리고 이 사람을 뽑았어. 히틀러!” 경악하는 학생들에게 피터는 다음의 말을 더해준다. “너희가 언젠가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세상은 결코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결코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야기

왜 마틴은 당대의 인물들을 알코올과 함께 소환했을까. 그가 벌이고 있는 실험 때문이다. 마틴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동료 교사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와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가 0.05%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를 유지해주면 더 느긋하고 개방적이며 대범해진다”라는 노르웨이 철학자 핀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실험 중이다. 이 실험에도 규칙은 있다. 

첫째.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할 것
둘째. 밤 8시 이후에는 술에 절대 손대지 않을 것

실험은 초반, 순항한다. 스코르데루의 주장처럼 적당한 알코올은 권태라는 절망에 빠져 있던 도시 중년 남자들의 삶에 활기와 유머를 불어넣어 준다. 학생들에게 재미없는 선생님으로 낙인찍혔던 마틴의 인기가 올라가고, 소원했던 가족 가족과 개선되고, 고독했던 삶에 생기가 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어나더 라운드>는 술은 마냥 애찬 하는 영화가 아니다. 

알코올에 대한 자제력을 잃기 시작한 이들은 침대에 오줌을 싸고, 갈지 자 걸음으로 위태롭게 학교를 거닐고,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길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버린다. 술의 힘을 빌려 좋은 아빠, 사랑스러운 남편, 존경받는 스승일 수 있었던 이들은 술로 인해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그들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주량을 지키지 못해서가 아니다. 삶이 권태로웠던 것 역시 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익숙함을 핑계로 일상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외로웠고, 이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술의 힘으로 무마하려 했기에 위험했고, 술이 좋은 삶으로 가는 촉매제가 아니라 목적이 됐기에 결국 실패했다. 영화는 그렇게 술을 통해 인생을 관조한다. <어나더 라운드>가 ‘술 영화’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영화’로 읽히는 이유다. 술을 사랑하는 애주가들에게, 그리고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 삶에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한 잔 술은 건강을 위해서, 
두 잔 술은 쾌락을 위해서, 
세 잔 술은 방종을 위해서, 
네 잔 술은 광기를 위해서.

-고대 철학자 아나카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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