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숙명여대 객원교수,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지난달 타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가 찬반논란 속에 국가장으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내란죄 등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그는 관련 법규에 따라 국립현충원에는 안장되지 않았다. 23일 타계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국립현충원에 가지 못한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사후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그러나 이는 유교적 왕조 문화의 잔재로, 다른 선진국들의 추세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제도다. 미국의 경우 지금까지 서거한 39명의 대통령 중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제27대 대통령과 존 F 케네디 제35대 대통령 두 명뿐이다. 나머지 대통령들은 향리의 본인 명의 기념도서관이나 교회 묘지 등에 매장되었다.

노예 해방으로 전 세계인의 추앙을 받는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의 유해는 그의 정치적 고향인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의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미국 대통령(1953~1961)을 지낸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장군(1890-1969)은 고향 캔사스주 애빌린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의 뜰에 세워진 조그만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5성 장군(General of the Army)이었던 그지만 그의 가족은 80달러짜리 일반 병사용 관을 사용했고, 다운증후군으로 요절한 딸 옆에 묻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처럼 세 살 때 죽은 아들 곁에 묻혔다.

프랑스 현대사의 위인 드골의 장례식은 1952년 미리 작성해 놓은 유언에 따라 그의 자택과 딸 안느의 무덤이 있는 시골 마을 콜롱베레되제글리즈(Colombey-les-Deux-Églises, 파리에서 동쪽으로 259.7km)에서 국장이 아닌 간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묘비도 유언에 따라 ‘샤를 드골(1890~1970)’이라고만 새겨졌다. 소박한 인간으로 돌아간 프랑스와 미국의 두 영웅, 드골과 아이젠하워의 최후의 모습이다. 두 사람 다 2차 대전 때 장군 출신으로, 후에 국민적 추앙을 받으며 대통령에 선출된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 북동쪽 콜롱베레되제글리즈의 드골 묘지 앞에 선 필자 부부.
프랑스 북동쪽 콜롱베레되제글리즈의 드골 묘지 앞에 선 필자 부부.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을 위한 국립묘지는 따로 없으며 드골, 미테랑 등 전직 대통령들은 대개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구체제의 왕족들은 파리 외곽의 생드니 성당 등에 안치되어 있다.

프랑스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곳은 파리의 팡테옹으로, 정치인이나 군인을 위한 곳이 아니라 빅토르 위고,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앙드레 말로, 퀴리 부인 등 프랑스 공화국에 현저한 기여를 한 위인과 천재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안장되는 역사적 인물들은 사후 바로 안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엄정한 심사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

2013년 베트남전쟁 영웅 고 채명신(1926~2013) 장군이 고인의 유언에 따라 국립묘지 사병묘역에 안장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크게 감동했다. 그런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 등 서양 선진국에서는 국립묘지 군인 묘역에 계급 구분이 없다. 필자는 워싱턴 근교에 위치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이메일로 문의했다. 그 결과 계급에 의한 군인 묘역 구별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There are no specific areas in Arlington National Cemetery for service members by rank.”) 또 프랑스 보훈처도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선진국의 국립 군인묘지는 기본적으로 전쟁터에서 산화한 용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심장부(‘the heart of Arlington National Cemetery’)는 대통령 묘역이나 장군 묘역이 아니라 위병들이 24시간 지키는 ‘무명용사의 묘’(‘the Tomb of the Unknown Soldier’)다. 또 프랑스 노르망디의 군인 묘지는 전사자들의 묘지다. 유서 깊은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등에서 전사한 무명용사 5000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지난 9일과 10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는 묘지 조성 100주년을 기념해 일반인들의 ‘무명용사의 묘’ 헌화가 허용되었다.

  위병들이 24시간 지키는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묘역.
  위병들이 24시간 지키는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묘역.

우리의 국립묘지는 어떤가. 퇴역한 장군들을 사후에도 특별 대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죽음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해야 한다. 국립묘지 군인 묘역을 사병, 장교, 장군으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정신과, 다른 선진국들의 추세에 맞지 않는다. 또 평시에 사망한 직업 군인들까지 근속 연한이 일정 기간 넘으면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시지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선진국 사례를 검토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상에 맞게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 국토가 좁은 나라에 제2 국립묘지까지 조성해 가면서 언제까지 국민 혈세로 이런 시대착오적인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