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임팩트 임철순 주필] ‘오징어게임’의 인기가 정말 놀랍다. 넷플릭스 TV쇼 부문 1위를 하다가 46일 만에 자리를 내줬지만, 그것만도 놀라운 기록 아닌가. 요즘 무슨 말이건 K를 갖다 붙이는 게 유행인데, ‘오징어게임’은 K드라마의 결정판인 것 같다. 다 좋다. K대통령, K정치, K대선 이런 말만 안 쓰면 된다. 아니다. 거꾸로 이런 것들에도 K를 붙여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몇 명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징어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그 인기를 놀라워하며 뿌듯해 했다. 그 자리에서 어느 여대의 여교수가 학생들이 한자를 너무 몰라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한자도 한자지만 우리말도 잘 모른다며 어떤 학생이 “골목이 무슨 말이냐?”고 묻더라고 했다. ‘오징어게임’의 골목놀이 때문에 나온 질문이라고 한다. 세상에, 골목을 몰라? 우리 모두가 다 놀랐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K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포스터.
           세계적으로 히트한 K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포스터.

골목을 모르면 골목길, 골목대장 이런 것도 당근 모르겠지. 골목을 모른다는 건 어려서부터 골목이 없는 아파트에만 살아왔다는 거고, 골목에 나가 놀거나 함께 논 동무가 없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동무라는 말도 공산당의 호칭으로만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사내아이들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하면서 친구들을 골목으로 불러내던 풍경 같은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골목은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런 곳에서 놀고, 뛰고, 쫓아가고, 숨고, 안고 뒤지기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삶(또는 세대)은 안쓰럽고 안타깝다. 막다른 골목은 더 갈 곳이 없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본 경험이 있어야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1934년에 발표된 이상(1910~1937)의 시 ‘오감도(烏瞰圖)’에도 골목이 나온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이렇게 시작한 ‘오감도’의 시 제1호는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렇게 끝난다. 골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난해한 시를 골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하다. 문학평론가 조해옥은 “(시에 나오는) 열세 명의 아이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타자에 대해 극대화된 적대감”이라며 이 시를 “완전히 개체화된 인간들이 타자에게서 동질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공포감과 연결된 근대인의 불안을 다룬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분석했다. “이 시가 암시하는 인간의 불안과 공포는 개인의식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20세기 문명의 특징인 끝없는 경쟁과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속도와 경쟁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오감도’의 세계는 결국 ‘오징어게임’이 다루는 세상과 같아 보인다. 

          골목놀이를 주제로 한 1970년의 크리스마스 씰.
          골목놀이를 주제로 한 1970년의 크리스마스 씰.

골목이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는 1995년 12월 2일, 검찰 소환에 불응한다며 연희동 집 앞에서 ‘골목성명’을 낭독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결국 다음 날 연행돼 구속됐지만 성명을 발표할 때는 호기로웠다. 그는 나중에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처신을 비난하면서 ‘주막강아지’라고 했다. 그러자 YS가 즉각 ‘골목강아지’라고 맞받아쳤는데, 골목을 알야야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거 아닌가.

골목에서는 좋지 않은 일도 일어난다. 뒷골목은 폭력 매춘 등 범죄와 연결되는 곳이다. 하지만 골목은 기본적으로 정겨운 곳이다. 요절한 조선의 천재시인 이언진(李彦瑱, 1740~1766)은 주로 골목 풍경을 시로 쓴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호동 이씨’라고 했는데, 거리 호(衚)와 거리 동(衕)을 쓴 호동(衚衕)은 길거리나 골목으로 해석되는 말이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쓴 시에 이런 게 있다. “서산에 뉘엿뉘엿 해 넘어갈 때/난 언제나 이때면 울고 싶어/사람들은 늘 있는 일이라/어서 저녁밥 먹자고 재촉하는데.” 전반적으로 슬픈 작품이지만 마지막 행에서는 끼니때도 잊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들어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처럼 정겹고 포근한 게 세상엔 얼마나 있을까. 천상병(1930~1993) 시인의 시 ‘귀천’에 나오는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느님이 부르는 목소리가 그런 것일까.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골목만 모르는 게 아니다. 교수가 금일 자정까지 과제를 내라고 하자 어떤 학생이 “금요일은 지났는데 왜 벌써 마감을 했느냐”고 항의했다. 금일은 금요일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설명하자 그 학생은 “학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시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는 아예 쓰지 말았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고 한다.

그런 거 또 있다. 지난해 정부가 8월 16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해 신문과 방송이 광복절부터 사흘간 연휴가 됐다고 보도하자 “4(사)흘 아니었어?” “왜 3일인데 사흘이라고 하냐”고 댓글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사흘을 4일로 안 탓이다.

설마 그런 말을 모르랴 싶지만, 17년 전인 2004년에 이미 미 프로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팀의 윌리 백맨 감독이 ‘4흘만에’ 해임됐다는 기사가 나간 적 있다. 본문만 그런 게 아니라 제목도 4흘이라고 붙였다. 3일 만에를 4흘로 쓰고 있으니 이를 어째야 좋나.

     골목놀이는 이제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권장해야 할 '행사'가 돼버렸다.  
     골목놀이는 이제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권장해야 할 '행사'가 돼버렸다.  

그러나 한심하다고 탓만 할 수 없겠다. 그런 사람들이 잘 아는 말 중에서 내가 전혀 모르는 말은 좀 많은가.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데 나는 그저 기왕에 있는 말에 매달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박두진(1916~1998)의 시 ‘해’에는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라는 대목이 있다. 이 시에 기대어 “골목을 따라 골목을 따라 새 말과 만나면 새 말과 놀고”, 위선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말의 골목이 더욱더 풍성해지고 갈래가 많아지고 길목과 통로와 출구가 다양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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